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-오스트리아 전쟁 (문단 편집) == 역사적 배경 == 독일 지역 내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]]와 [[프로이센 왕국|프로이센]]의 주도권 경쟁은 멀리 16세기 [[종교개혁]]으로 거슬러 올라간다.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의 [[합스부르크 가문]]이 [[보헤미아 왕국|보헤미아]]와 [[헝가리 왕국|헝가리]]-[[크로아티아 왕국|크로아티아]]를 상속받아 [[합스부르크 제국]]을 형성해 동유럽을 호령할 무렵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]]을 통치하던 [[호엔촐레른 가문]]은 종교개혁으로 수도원 재산을 몰수해 재정을 튼튼히 하고 [[프로이센 공국]] 상속 준비를 하는 등 착실하게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. 북독일 [[개신교]] 제후들의 성장과 더불어 17세기 중반 [[30년 전쟁]]으로 체결된 [[베스트팔렌 조약]]에서 [[신성 로마 제국 황제]][* 15세기 중반부터 [[합스부르크 가문]]에서 후보자를 배출해 왔다.]가 북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18세기 중반 [[마리아 테레지아]]와 [[프리드리히 대왕]] 시기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과 [[7년 전쟁]]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되었다.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[[합스부르크 가문]]이 남계 단절로 일시적으로 [[신성 로마 제국]] 제위를 잃었을 때 북독일에서 성장한 프로이센이 [[슐레지엔 주|슐레지엔]]을 점유하며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완전히 없앴다. 7년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[[프란츠 1세]]가 1757년 [[제국의회(신성 로마 제국)|제국 의회]]에서 평화 유지 의무를 저버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상대로 제국전쟁을 선포했지만 또 다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황제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. 이후 [[나폴레옹 전쟁]]을 거치며 [[신성 로마 제국]]이 해체되었고 [[빈 회의]]에서 승전국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나란히 영토를 확장했다.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견제에만 치중하고 외지오스트리아(Vorderösterreich)로 알려진 역외 영토[* [[라인강]]변 [[알자스]]와 [[슈바벤]]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[[월경지]] 영토들로 13세기 [[스위스]]에 집착한 이유도 본거지인 [[오스트리아 공국]]과 경제력이 높은 라인강변 영토들을 연결하기 위함이었다. 그러나 본토와 너무 멀어 심심하면 [[프랑스 왕국]]에게 털렸고 [[요제프 2세]] 때부터 라인강변 영토는 포기하고 본토와 가까운 곳에서 확장에 치중했다.]를 전부 포기하고 [[이탈리아 반도]] 북부에서 [[롬바르디아-베네치아 왕국]] 수립, [[토스카나 대공국]]과 [[모데나 레조 공국]]의 합스부르크 가문 방계 군주 옹립 등 실리를 챙기면서 향후 프로이센의 독일 내 지분만 확대되었다. 프로이센은 프랑스령 또는 프랑스 위성국령인 [[라인란트]]와 [[베스트팔렌]] 지방을 얻었는데 [[작센 왕국]]으로부터 [[작센안할트|얻은 영토]]와 합쳐 북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프랑스령과 인접한 영토는 경제력이 높은데다 [[산업 혁명]] 당시 급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에 농업 중심의 [[도나우 강]] 연안 영토를 지닌 오스트리아보다 경제력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로써 프로이센은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일 [[관세동맹]]을 주도하며 [[소독일주의]]에 기반한 [[독일 통일]]의 발판을 마련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